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마스 아퀴나스 (문단 편집) == 영향 == >‘스콜라 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중세의 박사들은 대단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부들의 방대한 저술들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풍부한 가르침들을 끈기를 가지고 수집해서 후대인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거의 한곳에 모아 놓았던 것입니다. > (...중략...) >그러나 모든 스콜라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단연 두드러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스콜라 학의 왕자이며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가예타노가 말하고 있듯이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점에서는 그 모든 이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예타노, In II-II Summa Theologiae, q.148, a.4: Ed. Leoninina, vol. X, n.6, 174면.] 성 토마스는 그들의 가르침들을 마치 흩어진 지체들을 한 몸으로 모으듯 수집해서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배열했고 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충 완성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가톨릭교회]]의 영광이며 비상한 보루라고 평가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 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철학의 분야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학문의 규범들, 신과 영적 실체들, 인간, 감각적 사물들, 그리고 인간의 활동들과 그 원리들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방대한 어떤 문제들의 집약이나 더 적합한 문제 배열, 더 나은 방법이나, 더 이상 탄탄한 어떤 원리나 논증, 더욱 명쾌한 논술 방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여하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마스보다 더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 (...중략...) >그리고 그는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켜 각각 자신의 권리와 품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은 성 토마스의 날개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위대함의 절정에 오를 수 있었고, 신앙도 이미 성 토마스와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한 도움을 이성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중략...) >거의 모든 [[수도회]] 창립자들은 자기 회원들에게 성 토마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이토록 위대한 스승에게서 조금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최고의 스승 때문에 영광을 누리는 [[도미니코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베네딕토회]], [[가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와 다른 많은 수도회들이 이런 비슷한 회헌 규정을 정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임 [[교황]]들께서 한결같이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지혜를 격찬하며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상 [[클레멘스 6세]](칙서 In Ordine), [[니콜라오 5세]](1451년 [[도미니코회]]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네딕토 13세]](칙서 Pretiosus)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 전체가 그의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서 조명되었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오 5세]]께서는, 이 가르침으로 속임수가 노출된 이단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 전체가 페스트와도 같은 오류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클레멘스 12세]](칙서 Verbo Dei)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가 성 토마스의 저술들에서 수많은 선익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게는 [[그레고리오 1세|그레고리오]], [[암브로시우스|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노]],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와 같은 최고의 교회 박사들에게 돌리는 것과 똑같은 영예를 마땅히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황들께서도 성 토마스를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스승과 모범으로 대학들과 고등학교에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 모든 것을 확인하려면, 복자 [[우르바노 5세]]께서 툴루즈 대학에서 행한 다음의 강연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복된 토마스의 가르침을 진실되고 [[가톨릭]]적인 것으로 따르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데 전심전력할 것을 간절히 바라며 명하는 바입니다”(1368/8/3 헌장 V). 그리고 [[인노첸시오 12세]]께서는 루뱅에서(1694/2/6 서한), [[베네딕토 14세]]께서는 그라나다의 디오니시아노 학원에서(1752/8/12 서한) 우르바노 5세의 모범을 따르셨습니다. > >그러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관한 [[교황]]들의 평가 가운데서도 [[인노첸시오 6세]]의 증언은 그 백미(白眉)입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은 (성서를 예외로 친다면) 다른 어떤 가르침 앞에서도 단연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힘찬 논증력과 명제들의 진리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법이 없었지만, 반대로 거기에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들은 언제나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인노첸시오 6세]], Sermo de sancto Thoma.] > >(그 속에서는 전세계에서 수집된 지혜의 꽃들이 번득이는) 세계 공의회들은 언제나 다투어 특별히 성 토마스의 탁월함을 강조했습니다. 리옹 공의회, 비엔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바티칸 공의회에 성 토마스는 말하자면 ‘참석’을 했고, 주제 토론과 선언문들을 언제나 ‘주재’하여 그리스인들과 이단자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을 거슬러 불굴의 투지로 대적했으며,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토마스의 최고의 영예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이 중앙 제단 위에 성서와 교황들의 선언문들 사이에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을 놓아 두고 의견과 근거와 해답들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톨릭 교회의 박사들에도 허용된 적이 없는 유독 토마스만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 > [[레오 13세]]의 1879년도 회칙인 <[[http://www.cbck.or.kr/book/book_search.asp?p_code=k5110&seq=400410&page=1&Cat=A&key=Title&kword=%EC%98%81%EC%9B%90%ED%95%98%EC%8B%A0%20%EC%95%84%EB%B2%84%EC%A7%80|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의 일부 구절. 참고로 이 회칙의 원제는 De philosophia christiana ad mentem sacti Thomae Aquinatis Doctoris Angelici in scholis catholicis instauranda(가톨릭 학교들에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정신에 따라 교육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해서)이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교황]]의 엄청난 빠심이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레오 13세]]의 시대부터 신스콜라철학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신학의 조류가 발전하였다. 스콜라철학을 현대화시킨 신학쯤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신스콜라철학의 또다른 이름이 네오 토미즘, 곧 신토마스주의이다. 가톨릭 신학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이 용어에서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